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암동 고분군 (문단 편집) == 조사 내용 == ||[[파일:구암동 56호.jpg|width=800]]|| || 구암동 고분군 56호분 || 그러한 중심의 구암동 고분군은 80년대에 [[영남대학교#s-7.4.2|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 '''구암동 56호분'''이 조사된 바 있으며 독특한 형태의 '''적석석곽묘'''[* 적석목곽묘에 비해서 돌을 더 많이 써서 마치 적석총처럼 보이는 점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를 채용한 고총 고분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에 구암동 고분군 자체의 조사는 없었으나 칠곡 분지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많은 삼국시대~남북국시대 신라의 생활유적이 발굴되어 고분군과 함께 일종의 도시와 같은 경관을 형성했음을 확인하였다. 또 주변의 대구 북구 지역과 현재 칠곡군 일대의 고분 축조양상이 비슷하며 구암동 고분군이 가장 대형의 고분군이므로 칠곡과 대구 북구를 포함하는 지역의 중심 고분군임을 확인하였다. 이후 체계적인 정비사업이 추진되면서 지표조사가 실시되었고 수백여기의 고분들이 함지산 척릉 마다마다 분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후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구암동 1호'''가 조사되었으며 5세기 후반 경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당초 예상과는 달리 3기의 고분이 연접된 형태의 적석석곽묘로 확인되었다. [[도굴]]을 당하긴 했지만 금제 귀걸이와 신라식의 은제대금구, 은제관모장식이 출토되어 주목된 바 있다. 유물이 많이 확인되었더라면 대구 남부 비산동, 대명동 및 달성 인근의 [[달성 고분군]]과의 관계도 적극적으로 조명될 수 있었을 것이다. [* 달성 고분군이라는 말이 다소 생소할 수 있는데 지금은 남아있는 고분이 없기 때문이다. 대구시의 성장과정에서 모두 파괴되었다.]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5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구암동 고분군을 중심으로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서 성장한 지방이 상정되며 동일한 문화적 양상이 나타나는 칠곡군과 대구 북서부 권역이 그 범위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세장방형[* 석곽의 평면 가로 세로 비율이 1대 2.5 이상의 가느다란 직사각형을 지칭함]의 석곽에 11자의 형태로 나란히 배치되는 양상은 구암동 및 인근의 고분군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이다. 따라서 5세기 이후의 신라의 성장과정, 특히 [[대가야]]를 견제하고자했던 신라의 정책 상, 지금의 대구 일대의 지역정치체들에 간접지배라는 방식으로 우호적인 정책을 펼쳤다고 보는 자료가 된다. 구암동 1호에서 나타나는 신라계 금공품이 그 증거인 셈. 2022년 4월 대구 북구는 대동문화재연구원과 발굴 도중 제5호분 매장주체부(주검안치시설)인 주곽과 부곽에서 다량의 유물이 출토됐다고 밝혔다. [[https://www.yna.co.kr/view/AKR2022041214410005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